우연 비누 No.01
우연도 하나의 재료입니다.
미술에는 우연을 창작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방식이 있습니다.
처음부터 완성된 형태를 계획하는 대신,
우연히 생긴 얼룩과 선, 번짐과 흔적을 바라보다가
그 안에서 새로운 이미지를 발견하고 작업을 이어 나갑니다.
초현실주의의 자동기술법(Automatism)이나
우연성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Aleatory Art 역시
작가가 모든 결과를 미리 통제하지 않고,
예상하지 못했던 결과까지 창작의 한 부분으로 받아들이는 방식입니다.
하얀 종이에 물감을 자유롭게 떨어뜨리고,
그곳에 우연히 만들어진 형태에서 무언가를 발견해
다시 하나의 그림으로 발전시켜 나가는 것처럼요.
PHYTO PALETTE는 이러한 미술의 창작 방식에서 영감을 받아 비누를 만들어 보기로 했습니다.
그렇게 시작된 것이 **〈우연 비누〉**입니다.
보통 비누를 만들 때에는 목적을 먼저 정합니다.
비누가 어떤 사용감을 가져야 하는지 생각하고,
그에 맞춰 오일의 종류와 지방산의 비율을 조정합니다.
그리고 그 비누에 어떤 식물을 사용할지,
어떤 허브를 오일에 침출하고 어떤 허브를 비네거에 담그며 어떤 허브를 물에 우려낼지를 결정합니다.
식물이 가진 특성과 목적을 생각하고 하나하나 이유를 가지고 레시피를 구성합니다.
하지만 가끔은그 모든 계획에서 벗어나 보고 싶었습니다.
손에 잡히는 허브를 자유롭게 집어 비네거에 넣고,
또 다른 허브들을 물에 넣어 우리고,
때로는 오일 속에도 그날 마음이 가는 식물을 담습니다.
무엇을 얼마나 넣었는지 일부러 적어두지 않습니다.
기억하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만들어진 이름 모를 식물의 조합으로 비누를 만듭니다.
비누의 기본적인 오일 구성과 지방산의 균형처럼 안전성과 품질에 필요한 부분은 여전히 설계합니다.
다만 그 안에 들어가는 식물의 조합만큼은 우연에게 자리를 내어줍니다.
그래서 완성되기 전까지는 이 비누가 어떤 색을 띠게 될지,
어떤 향의 흔적이 남을지,
어떤 식물들이 서로 만나 하나의 인상을 만들게 될지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그리고 완성된 뒤에야 그 결과를 발견합니다.
그림을 그리다 우연히 만들어진 얼룩 속에서 예상하지 못했던 형상을 발견하는 것처럼,
우연히 만난 식물들이 만들어낸 결과를 나중에 바라보고 발견하는 비누입니다.
그리고 이 비누는 다시 만들 수 없습니다.
어떤 허브를 사용했는지 기록하지 않았기 때문에동일한 조합을 다시 재현할 수 없습니다.
비슷하게 만들 수는 있어도똑같은 비누는 다시 나오지 않습니다.
그 재현할 수 없음까지도〈우연 비누〉를 만드는 과정의 일부입니다.
각각의 배치에는 번호만 남깁니다.
우연 비누 No.01
그다음에는 No.02가 만들어지겠지만
No.01과 같은 비누는 다시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우연히 선택된 식물, 그날의 온도와 시간, 침출되어 나온 색과 향,
그리고 그것들이 한 번 만나 만들어낸 결과.
우연도 하나의 재료입니다.
〈우연 비누〉는완벽하게 계획된 레시피를 반복하기 위한 비누가 아니라,
한 번의 우연을 하나의 결과물로 남기는 비누입니다.
CHANCE SOAP No.01
우연 비누 No.01
PHYTO PALETTE
우연 비누 No.01